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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nny (一常脫出)

우리민족 운명을 결정한 사람 (A man who decided our tribe's fates)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한 한 사람

우리 조국과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한 사람이 있었다.

1950년 6월 25일(日)

공산군의 기습 남침으로 사흘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대한 민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위험에 처했을 때,

우리 조국과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한 사람이 있었다.

2011 년은 6.25 남침 61주년이다.

6.25 가 일어난 가장 큰 원인은 주한미군(駐韓美軍)이 철수하고 한미(韓美)동맹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미국이 연 150만 명의 병력을 한국으로 보내

우리를 구해주었던가?

미국 군부는 한국은 지킬 수도 없고,

지킬 필요도 없는 곳이라고 판단하고

주한미군을 1년 전에 철수시켰는데

누가 미군(美軍)을 보내 5만 4000명을 죽게 하는 혈전(血戰)을 치른 끝에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국민들'을

공산 침략으로 부터 구출했던가?

도대체 누가 이런 일을 했는가?

우리 역사상

한 민족 전체의 운명이

단 한 사람, 외국인에 의하여 결정된 일이 일어난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는 누구인가? 맥아더인가?

아니다.

맥아더를 한국전선(戰線)으로 보낸,

즉 미군(美軍) 의 참전을 결단 하였던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 미국 대통령(35대)이다.

1950년 6월 24일 미국 미조리 인디펜던스

(미국의 날짜, 미국은 한국보다 하루 늦은,

한국 25일, 동시각 미국 24일 토요일)

1950년 6월24일 트루먼 대통령은 주말週末을 고향에서 보내고

있었다.

토요일인 이날 오후 그는 비행기 편으로 워싱턴에서 고향인

미조리주 인디펜던스로 날아왔다.

밤9시 잠자리에 들려는 대통령을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걸어온 전화였다.

“각하, 매우 심각한 소식입니다.

북한군이 남한을 전면적으로 공격했습니다.

무초 대사의 보고에 따르면 그 전에 있었던

총격전과는 다른 본격적인 공격입니다.

유엔 사무총장에게 안보리 소집을 요청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즉시 워싱턴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애치슨은 말렸다.

“야간 비행은 위험하고, 지금 국민들을 놀라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해야 할 조치는 취했습니다.

잠이 오시면 푹 주무세요.”

일설에 의하면 이때 트루먼 대통령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개자식들을 저지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결정을 하는 데 10초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곁에 있었던 딸 마가렛의 회고에 의하면

트루먼은 전화를 받고 돌아오면서

매우 격앙되고 걱정스런 표정이었다고 한다.

3차 대전의 서막이 오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다음 날 트루먼은 일찍 일어나 동생 비비안의 목장에 갔다.

그는 비비안의 다섯 손자 손녀들과 악수를 하고는

우유 짜는 기계와 새로 산 말을 살펴보았다.

그날 아침, 신문과 방송에선 북한군의 남침 소식이 보도되고 있었으나

트루먼은 한국 사태에 대해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정오 직전 무초 대사가 보낸 전보(電報)가 그에게 건네졌다.

<공격의 양상으로 보아 한국에 대한 전면적인 공세임이 분명해졌다>.

12시30분 애치슨 장관이 다시 대통령에게 전화를 했다.

통화를 끝낸 트루먼 대통령은 보좌관들에게

“즉시 워싱턴으로 돌아갈 것이니 캔사스 시티 공항으로 집합하도록

하라”는지시를 했다.

트루먼이 결단하고 애치슨이 이끌다

워싱턴으로 날아가는 전용기안에서 그는 워싱턴으로 전화를 걸게 하여

저녁 식사를 겸한 고위 대책회의 소집을 지시했다.

약 3시간의 비행시간중 트루먼 대통령은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나는 과거 민주국가들이 이런 공격을 저지하지 않아

침략자들이 그런 짓을 계속하도록 방치했던 일들을 생각했다.

만약 공산주의자들이 자유 세계로부터 아무런 저지를 받지 않고서

한국을 침략하도록 허용된다면

강한 공산국가를 이웃으로 두고 있는 작은 나라들은

협박과 공세를 견디지 못할 것이다.

이번 공격을 방치한다면 3차 대전이 일어날 것이다.

비슷한 사건들이 2차 대전을 불렀듯이 >

저녁에 대통령 전용기 인디펜던스 호가 워싱턴 공항에 착륙했다.

애치슨 국무장관, 존슨 국방장관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리무진을 타고 영빈관인 블레어 하우스로 향하는 차중에서 트루먼은

말했다.

“하나님에게 맹세코 그 자들이 대가를 치르도록 해주겠어”

블레어 하우스에는 14 명의 최고위급 인사들이 모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는

전쟁 이야기를 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식사가 끝나고 식탁이 정리된 뒤 회의가 시작되었다.

딘 애치슨 장관이 상황 보고를 했다.

대통령은 참석자 전원이 발언하도록 유도했다.

러스크 국무차관은

“5년간 한국에 주둔했던 미국으로서는 특별한 책임이 있다.

한반도가 공산화된다면 이는 일본의 심장을 겨누는 비수가 될 것이다”고

했으며,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공산당에 대해서 선을 그어야 한다”고 말했다.

소련은 전쟁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우리를 시험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회의는 트루먼이 주도했다.

그의 결심이 회의 분위기를 압도했다.

트루먼은 브래들리의 말을 받아서

“선을 단호하게 그어야 한다”고 했다.

“북한군을 저지해야 한다. 소련은 도박을 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이 또 다른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싫어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한국을 공짜로 삼키려 한다”

셔먼 해군참모총장과 반덴버그 공군참모총장은

해공군만으로 남침을 저지할 수 있다면서 육군의 투입을 반대했다.

트루먼은 회고록에서

“아무도 미국이나 유엔이 물러서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

이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선 무슨 수든지 써야 한다는 분위기였다”고 했다.

이날 회의는 트루먼이 결단하고 애치슨이 이끄는 형국으로 진행되었다.

애치슨이 건의한 정책들을 트루먼이 승인했다.

도쿄의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최대한 빨리 한국측에 무기와 보급품을 제공할 것,

미 공군력의 엄호 아래 주한 미국인을 철수시킬 것,

제 7함대는 필리핀으로부터 대만 해협으로 전개하여

중국의 공격에 대비할 것 등.

이날 회의는 미군을 활용, 한국을 방어할 것을 결의하고 밤 11시에 끝났다.

참석자들은 기자들을 피하기 위하여 뒷문을 통해서 빠져나갔다.

트루먼 대통령은 함구령을 내렸다.

“육군도 보내라” 다음날 (워싱턴 6월25일, 서울 6월26일)

맥아더 원수는 “한국군은 북한군을 저지할 수 없다.

완전한 붕괴가 임박했다”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이날 저녁 트루먼 대통령은 블레어 하우스에서

두 번째의 긴급 각료회의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한국전 개입 결정이 공식화되었다.

미국은 한국군을 돕기 위해 해군, 공군을 사용하도록 결정한 것이다.

이날 회의도 애치슨 국무장관이 주도했다.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머지 않아 육군이 투입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한국에 대한 전쟁 계획조차 없다는 점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허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전쟁을 하기 싫다.”

다음날은 워싱턴 시간으로 6월27일.

북한군 탱크가 서울에 진입했다는 뉴스가 일제히 나갔다.

오전 11시 30 분 의회 지도자들, 국무장관, 국방장관, 합참의장 등

40명의 요인들이 백악관의 각료실에 모였다.

이 회의에서 트루먼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에 의하여

전쟁을 지도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의회가 별도로 전쟁 결의안을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상하원 합동 회의도

315 대 4표 차이로 징병 기간을 1년 연장하는 결의를 했다.

유엔 안보리는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유엔군을 편성하여 공산군을 저지하기로” 결의했다.

1950년 6월 30일 새벽 3시

미 국방부는 한국전선을 시찰한 맥아더 원수의 전문을 받았다.

그는 미국의 해공군뿐 아니라 육군의 투입이 있어야

북한군을 저지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타이밍이 핵심이다. 지체 없는 명확한 결정을 바란다."

프랑크 페이스 육군 장관이 백악관으로 전화를 건 시각은 새벽 4시47분.

트루먼은 벌써 일어나 면도를 마친 상태였다.

그는 침대 옆에 있는 수화기를 들었다.

페이스 장관은 맥아더가 우선 2개 사단의 투입을 건의했다고 말했다.

트루먼은 주저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는 한국으로 지상군을 파병하는 결정이

가장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결정보다도 더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저지하여 자유 국가를 지켜내야 한다는

사명감과 아시아에서 큰 전쟁을 일으켜선 안 된다는

걱정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날 일기에서 트루먼은

“모택동은 무슨 짓을 할까.

러시아의 다음 행동은 무엇일까”라고 썼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나중에 이렇게 평했다.

<대통령이란 직책은 결정하는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결정했다>

이렇게 하여 워싱턴에 있는 한국전 기념물의 명문(銘文)대로

“잘 알지도 못 하는 나라,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하여”

미국의 젊은이들이 한국으로 파병된다.

3년간 전장戰場에서 5만 명이 죽고 10만 명 이상이 다쳤다.

우리 역사상 한국인의 운명이 외국인 단 한 사람에 의해서

결정된 것은 이 경우가 처음이었다.

트루먼은 미군을 투입하여 한국을 지켜내야 할 아무런 의무가 없었다.

당시 미 군부는 한국은 미국이 싸워서까지 보호할 만한

전략적 가치가 있는 곳은 아니라는 전략적 판단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트루먼의 파병 결정은 극히 예외적인 조치였다.

학자들이 참전 결정의 이유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분석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트루먼 대통령의 성격과 인간됨이었다.

백악관 공식 초상화

그는 미국 미조리 주 의 가난한 농가(農家)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철도회사 검수원(檢數員)을 지내기도 했으며

직접 작은 상점도 운영하다가

대공황 때 부도를 낸 적도 있는 서민이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20 세기 미국의 유일한 대통령이기도 했다.

그는 육사(陸士)에 들어가고 싶어 했었다.

그러나 어렸을 때, 과도한 독서로 시력이 안 좋아 신체 검사에 불합격했다.

1차 대전이 터지자

시력 검사표를 모두 외운 후, 검사를 통과, 자원 입대하여

프랑스 전선에서 포병장교가 되어 용감하게 싸웠다.

그는 전형적인 미국의 시골사람, 순박하고 솔직하고 용감하며,

힘 센 사람이 으스대는 것을 참고 보지 못하는 반골(反骨)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에게 스탈린이 김일성(金日成)을 앞세워 뺨을 때린 격이었다.

슬며시 돌아드는 게릴라전이 아닌

공개적인 전면 남침(南侵)은 최대 강국 미국의 체면과 함께

트루먼의 성깔을 자극했다.

미국의 전형적인 시골 사람의 성격,

순박, 솔직, 용감한 그의 기질이 결정을 내렸다.

공산군의 불법 남침에 대항,

미군을 파병, 격퇴시키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인간 트루먼이 한국을 살린 것이다.

그런 트루먼을 기억하는 한국인들은 많지 않다.

6.25 전쟁을 누가 일으켰는지 모른다는 19세 이상 성인成人

인구가 15%, 약 500만 명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트루먼을 기억하게 하는

공원이름, 거리이름, 무엇 하나 없다.

트루먼 대통령 동상은

판문점 근방 잘 안 보이는 곳에 하나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알만한 사람은 잘 알고 있다.

우리 민족이 진정 생사 갈림길, 위기에 처했을 때

그의 정의감, 그의 용기 있는 결단이

우리 민족을 구해 냈다는 것을 .....

대한 민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위험에 처했을 때